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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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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외적인 경우 ==== 특기할 만한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1943년 9월과 12월에 [[프라하]] 근처의 테레지엔슈타트[* 체코어 이름은 테레진.] 게토에서 온 약 18,000명의 [[체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는 분리 작업이 없었다. 그들은 BIIB 수용소라고 불리는 일종의 가족 수용소에서 단체로 수용되었는데 머리가 깎이지 않은 것은 물론, 가지고 온 옷가지와 짐들까지 모두 가지고 있던 채로 약 6개월 가량을 대기했다. 노인과 아이들까지도 따로 선별되지 않고 가족과 그대로 머물 수 있게 허락받았다. 수감자 중 하나로서 당시 BIIA 수용소의 등록 업무를 맡고 있던 루돌프 브르바(Rudolf Vrba)[* 체코계 유대인 생화학자이며,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증언한 귀중한 자료인 브르바-베츨러 보고서를 작성한 장본인이다. 학살에서 생존했으며 2006년에 사망했다.]의 증언에 따르면 수용 기간 동안 이들의 생존률은 4분의 3이었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여전히 경악스러울 정도로 높은 사망률이지만 아우슈비츠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독보적으로 높은 수치였고, 노약자들까지 포함한 경우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SS가 이들에게 더 나은 식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중에는 BIIB 수용소 내에 어린이 수감자들을 위한 자체적인 [[학교]]까지 건립되고, [[친위대(나치 독일)|SS 대원]]들도 유대인들의 연극을 관람하러 가거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등[* 브르바는 이 아이들과 SS가 꽤나 친밀했다고 증언했다.] 아우슈비츠의 일반적인 살풍경한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지기도 했다. 때문에 수용소 내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었던 브르바는 이들을 레지스탕스에 가담시켜 아우슈비츠의 학살 공정을 잠시나마 막아 보려는 구상을 하기도 했다. 비록 노약자가 상당수 섞여 있기는 했으나 수천 명이나 되는 건강한 수용자들이 함께 봉기를 일으킨다면 학살 공정을 파괴한다는 목표를 이룰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6개월 수용 뒤 1944년 3월에 결국 살해당할 운명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BIIB 캠프 자체가 테레지엔슈타트의 유대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SS의 속임수였기 때문이다. 가령 BIIB 수용소의 체코 가족 수감자들은 잘 대우받으며 지내니 걱정 말라는 편지를 테레지엔슈타트로 보내야만 했다. 그들 개개인이 지급받은 식별 카드에는 '6개월 격리 후 SB' 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는 '특수 처리'라는 뜻인 Sonderbehandlung의 약자였다. 아우슈비츠에서 '특수 처리'는 가스실 살해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1944년 2월부터 각 수용소 소각장과 대량의 석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존더코만도들로부터 들어오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레지스탕스 측은 이들을 포섭하기 위한 작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였으나, 자그마치 6개월이나 잘 대해주고는 갑자기 몰살한다는 비상식적인 처사를 이해하지 못한 체코 가족 수용자들은 이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이]]들이었다. 봉기에 가담한 이들은 거의 대부분 죽을 것이 확정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죽을 것이 확실한 전장으로 끌고 간다는 선택을 부모로서 쉽사리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SS가 선수를 쳐 전 수용소에 통행금지령을 내렸으며, 체코 가족 수용자들은 하이데브레크로 이송된다는 명목으로 가스실에서 살해당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3월의 학살에서는 노약자들을 우선으로 3,800명이 한번에 살해되었고, 7월에는 3,000명이 선별되어 기타 노동수용소로 보내진 후 남은 이들 중 7,000명이 살해당했다.] 역시 체코슬로바키아 유대인이자 존더코만도 중 하나였으며 레지스탕스 일원으로서 현장에 있었던 필리프 뮐레르(Filip Müller)의 증언에 따르면 체코 가족 수감자들은 그제서야 자신들 역시 학살의 대상이며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우 동요했다고 하며, SS에게 항의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매질이었다. 결국 그들은 [[나의 조국은 어디에?|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와 유대인들의 국가인 [[하티크바]]를 부르며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았다. 동향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던 뮐레르는 그들과 같이 최후를 맞고자 가스실로 뛰어들었으나, 오히려 그를 알아본 한 유대인 여성이 죽지 말고 살아서 자신들의 죽음을 후대에 전하라며 그를 설득하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 뮐레르는 결국 살아남았고, 아우슈비츠 폐쇄 후 마우타우젠으로 이송되었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전후에는 평생에 걸쳐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의 진상 규명에 힘썼다. [[클로드 란츠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쇼아(영화)|쇼아]]'에도 출연하여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 독일 극우파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2013년 향년 91세로 독일 만하임에서 사망했다. 그는 전후에도 독일에서 살았던 유일한 존더코만도였다.][* 출처: [[클로드 란츠만]], "[[쇼아(영화)|쇼아]]", 필로소픽, 218~234p] 이후 브르바는 다른 수감자인 알프레드 베츨러와 함께 탈출해 서방에 학살 소식을 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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